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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 불가침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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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약 체결 == 이어 [[이오시프 스탈린]]은 답신을 보낸 8월 21일 외무라인에 영불과의 협상 모색을 중단시키고 [[나치 독일]]과의 협상 준비를 시킨다. 8월 23일, [[아돌프 히틀러]]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리벤트로프를 위시한 나치 독일 외교단이 [[소련]]으로 비행기를 타고 갔다. [[모스크바]] 공항에는 [[하켄크로이츠]] 깃발들이 장식되어 있었고, 리벤트로프는 모스크바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몰로토프의 영접을 받으며 공항에서 점심을 먹고 크렘린으로 직행했다. 크렘린에서는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스탈린 본인이 직접 독일 사절단을 맞이했다.[* 사실 의전에서 일개 외무장관을 최고 권력자가 맞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좀 더 환영 제스처를 보였다면 [[바지사장]]이었던 소련 국가 원수 [[미하일 칼리닌]]이 영접했겠지만, 당시 전쟁이 임박했음은 유럽인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최고 권력자였던 스탈린이 직접 나옴으로써 환대의 의사를 표시했다.] 원래는 양국의 외무장관인 몰로토프와 리벤트로프가 협상을 해야 했지만, 스탈린이 동석하면서 사실상 스탈린이 직접 리벤트로프와 교섭하게 되었다. 협상은 리벤트로프가 도착한 8월 23일 오후부터 밤 늦게까지 계속되었으나, 의외로 양 독재 국가는 아귀가 잘 맞아서 여러 현안[* 유일하게 합의가 잘 안 됐던 곳은 [[라트비아]]였는데, 리벤트로프가 히틀러에게 보고하자 히틀러가 라트비아를 바로 포기하며 마무리되었다.]에 대해 쉽게 합의했다.[* 소련은 유럽 국가들과 독일이 서로를 견제하는 동안 국력을 키울 시간을 얻었고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국제 조약을 휴지조각으로 생각하던 히틀러에게도 독소 불가침조약은 유럽을 쓸어먹고 소련의 통수를 치기까지의 귀중한 시간을 벌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 스탈린과 리벤트로프는 협상이 의외로 술술 풀리자 점점 의기투합하여 나중에는 서로 극단적인 농담까지 주고받았을 정도였다.[* 리벤트로프가 스탈린에게 '''"독일 [[방공 협정]]에 소련도 가입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스탈린이 이에 '''"오늘부터 나도 반공주의자요."'''라고 화답한 게 바로 이때 나왔다. 히틀러 집권 이래 독소 양국간의 관계를 본다면 이런 농담은 마치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이 [[교황]]에게 "교황 성하도 [[이슬람]] 신자가 되는 게 어떻습니까?"라고 말하자 교황이 "오늘부터 나도 [[무슬림]]이오."라고 대답한 것과 같은 충격적인 발언으로, 리벤트로프가 가져온 보따리가 스탈린에게 그만큼 크게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리벤트로프는 스탈린에게 1936년의 [[추축국|독-이-일]]의 3국 협정은 겉으로는 소련을 적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미-영-불이 주도하는 서방 질서를 흔들기 위한 것이라고 협상 내내 주지했으며, 이는 영불에 의심을 넘어 배신감을 느끼던 스탈린을 기쁘게 했다. 대단히 흡족한 스탈린은 8월 23일 밤, 다차에 측근들을 불러모아 연회를 베풀면서 "영국과 프랑스 놈들도 내일이면 알게 되겠지. 그놈들은 빈손으로 집에 가야 할 거야."라고 비웃으며 [[니키타 흐루쇼프]]를 비롯한 측근들에게 소련이 얻게 된 이득에 대해서 설명했다.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조약을 심의하면서 서방이 히틀러를 앞세워 소련을 침공하려 하지만, 이 조약으로 판을 완전히 뒤집었다고 대단히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자신을 속였다고 여기겠지만 사실은 자신이 히틀러를 속인 것이라는 자신감을 보였다. [* 그럴만한게 스탈린은 독일이 프랑스로 진공하면 또 참호전 양상이 될 것이라 예측했다. 당장 20년전 대전쟁이 그랬고, 지금의 독일은 그때의 독일보다 작고 동맹국도 없었다. 영불 연합군과의 싸움에서 지친 독일의 뒷덜미를 잡아챌 기회만 노리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뒤집은 [[엘랑]]때문에 스탈린의 노림수는 모두 빗나갔다.] 영불과의 협상이 질질 끌려서 1년이 지나도록 진척이 없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소련-독일은 단 하루 만에 유럽의 운명을 결정할 모든 현안에 대해 합의하고 다음 날인 24일 모든 항목에 대한 합의문을 작성하였다. 그리하여 아래 그림과 같이 스탈린이 지켜보는 가운데 리벤트로프와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MolotovRibbentropStalin.jpg]] 크렘린에서 조약에 서명하는 [[몰로토프]]. 몰로토프 바로 뒤에 있는 양복 차림의 사람이 [[리벤트로프]]이다. 그리고 그 오른쪽이 [[스탈린]]. 리벤트로프의 바로 왼쪽의 군복 입은 사람이 당시 [[소련군]] [[총참모장]]이었던 [[보리스 샤포시니코프]] 원수.[* 맨 왼쪽 키 큰 사람은 리벤트로프의 비서인 리하르트 슐체(1914-1988)로 SS장교였다. 2차 대전 발발 이후 외교업무를 그만 두고 전선으로 나갔으나 전후 미군에 체포되었다. 3년간 복역끝에 풀려나 사업가로 일했다. 이 사람은 끝까지 무장친위대의 전쟁범죄를 부인했다.][* 스탈린의 바로 옆 오른쪽의 서류뭉치를 안고 있는 사람은 소련 고위직의 독일어-영어 통역이었던 블라디미르 파블로프(1915-1993)로 이후 소련 외교관으로 일했다.][* 몰로토프에게 서류를 건네주는 사람은 알렉산드르 슈크바르체프(1900-1970)으로 소련 외교부 고위 관리였고 이후 주독일 소련대사로 일했다.] 스탈린은 조약 체결 후 환영 만찬에서 리벤트로프에게 "히틀러 총통에게 전해주시오. 나는 이 협약을 끝까지 지키겠다고."라고 맹세했고, 리벤트로프도 이 조약에 대해 끝까지 충실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리벤트로프는 추후 [[독소전쟁]] 개전에 매우 소극적이었고, 개전 후 소련 외교관들에게 "나는 이 전쟁에 반대했다고 스탈린 각하께 전해주시오."라고 변명하듯 말했다. 게다가 전쟁 내내 소련과의 강화를 모색했다. 사실 외무장관이니만큼 전쟁을 해봤자 성과는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으며, 대소 개전은 자신이 기껏 만든 성과를 갈아엎어 버리는 짓이니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다. 국익을 추구해야 하는 외교관 입장에서 사방팔방에 적을 만드는 히틀러의 비이성적 행동은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소련에게 리벤트로프가 소련과의 우호관계에 큰 공을 세웠고 정말 전쟁을 원치 않았던 것은 중요하지 않았고, 리벤트로프는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홀로코스트]]의 주범이자 나치 독일의 전쟁 수행의 핵심으로 제일 먼저 교수형을 집행받게 된다. 재밌는 점은 리벤트로프가 외무부 장관이 될 수 있었던 건 전임자였던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가 히틀러의 전쟁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미래에 대해 완전히 낙관하진 않았다. 그는 리벤트로프에게 "우리는 서로 욕을 잘도 해댔습니다. 그렇지 않았나요?"[* 출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77]라고 발언했는데, 이는 지금까지 소련과 독일 사이의 해묵은 원한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도 없고 이후 재발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베르히테스가덴에서 불가침 조약이 성공리에 체결됐다는 것을 보고받은 히틀러는 [[샴페인]]을 주문해 한 잔 마신 후 '''"이제 유럽은 내 것이다!"'''라며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파일:external/gdb.rferl.org/97C7E3FD-2173-4AD8-9E72-0658A132D986_w650_s.jpg]] 조약을 체결하고 의기양양하게 베를린에 돌아온 리벤트로프를 맞이하며 크게 기뻐하는 히틀러. [[환희]]에 가득 차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조약의 체결로 환희에 찬 히틀러는 리벤트로프를 '''제2의 [[비스마르크]]'''라고 부르며 환영했다.[* 참고로 해당 이미지에서 히틀러와 리벤트로프 사이에 있는 4명은 왼쪽부터 발터 헤벨, 게르하르트 엥겔, 카를 보덴샤츠, 베른트 고트프리드센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Walther_Hewel|발터 헤벨]]은 당시 외무장관 리벤트로프의 개인 참모장이었고 독일이 패전하자 도망치던 도중 자살했다. [[https://ko.wikipedia.org/wiki/%EA%B2%8C%EB%A5%B4%ED%95%98%EB%A5%B4%ED%8A%B8_%EC%97%A5%EA%B2%94|게르하르트 엥겔]]은 히틀러의 육군 부관으로서 전후에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군사학회 대표를 역임하기도 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Karl_Bodenschatz|카를 보덴샤츠]]는 [[헤르만 괴링]]과 히틀러 사이의 연락장교였고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서 중상을 입기도 했으나 끝내 전후까지 살아남아 1979년까지 살았다. [[https://de.wikipedia.org/wiki/Bernd_Gottfriedsen|베른트 고트프리드센]]은 외무부 공사참사관으로서 전후 징역을 살았고 석방 후에는 교사로 일했다. 참고로 해당 이미지에는 잘려서 안 보이지만 사실 리벤트로프 오른쪽에는 [[에른스트 폰 바이츠제커]]도 [[https://www.gettyimages.de/detail/nachrichtenfoto/reichsaussenminister-joachim-v-ribbentrop-erstattet-nachrichtenfoto/545957413|위치]]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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